카테고리 없음

시립미술관 로댕전 보러갔다가 구경한 덕수궁

소나무(감자) 2010. 9. 1. 16:35

휴가 마지막....
8월 15일 일요일
서울시립미술관 로뎅전 초대권이 2장 있어서 전철타고 나들이 간다.

일요일날 종점에서 타는 전철은 사람 구경이 힘들다.

시청역에서 내려 찾아간 서울시립 미술관
표가 2장 뿐인지라 아이와 아내만 들여보내고...
미술관 1층에서 전시중인 무슨무슨 사진전.
그냥 잘 찍었음직한 사진들도 있고,
거의 회화 작품처럼 보이는 사진(?)들도 있고.
일요일이고 아이들 방학 끝물인지라 방학숙제겸 오신분들까지 북적북적...

사람 없는 틈을 타서... 후딱 -.-;;



 

밖으로 나왔다.

알몸들만 잔뜩 있어서 수민이는 하나도 보지않았다고하고.
아내도 하는 말이 전부 복제품들이어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덕분에 나는 기다리는 시간 줄었다.

미술관을 나와 덕수궁 담벼락에 있는 조각작품 '장독대'


 

대한문 앞에서 왕실 호위 무사들 교대식을 재연 하고 있다.
그냥 무덤덤...

==============================================================================================================
덕수궁: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1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병란에 소실된 까닭에 머물 궁이 없었기에 왜군들이 주둔하여 파괴를   면한 당시 황화방(皇華坊:정릉동 일대)의 종친과 양반가 등의 민가들을 수용하여 임시 궁궐로 개조, 정릉동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로 머물게 되었다.

생전에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이곳 행궁에서 승하하신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에 창덕궁 복구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한편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경운궁 별당(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 건물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나게 된 후로 경운궁은 어려운 시절의 쓰라림을 회상하는 뜻 깊은 공간인 궁으로 남게 되었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인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건양 2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지면서 경운궁은 고종에 의해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이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킨다. 1907년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진 순종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함으로써 경운궁은 마침내 궁궐로서의 임무를 다하게 되었다.

한편,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가 붙여지게 되면서 오늘날의 덕수궁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데, 덕수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 이기도 했다. 이처럼 덕수궁이란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인 것이다.

1919년 고종이 침전인 함녕전에서 승하하면서 주인 없는 궁궐 덕수궁은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전각들이 파괴, 왜곡되었다.
1922년 일제는 선원전의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었는데 이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며, 이때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엄비의 혼전은 헐려 경기여고가, 또 도로의 동편에 있던 제사준비소 터에는 지금의 덕수초등학교가,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궁내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게 되어 훼철된 덕수궁은 1933년 10월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현재 남아 있는 경운궁의 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1/3정도일 뿐이다.


출처: http://www.palaceguide.or.kr/

==============================================================================================================

그러니까 왕이 기거하던 창덕궁이 변란으로 훼손되자 임시로 준비한 궁궐이라는...
궁궐을 Back-up하는 또 하나의 궁궐.


중화전 앞의 중화문을 지나


 

중화전으로...

조선시대 왕이 집무를 보던 곳은 원래 근정전인데.
가끔 중화전에서도 집무를 봤다고 하기도 하고,

명성화후 시해사건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궁한 곳이 이곳 경운궁이라고 한다.

왕이 다스리던 시절의 민초들의 생각과 삶은 어떠했을까


 

 

 

석어당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임금이 16년동안 기거했다는...
난 건물을 왜 이렇게 관리를 안하나 투덜거렸는데, 이 건물은 원래 단청이 없다고 한다.
이 건물 마음에 든다...


석조전은 개보수 공사중이었다.
고종이 서양문물에 심취해 지었을 덕수궁 석조전...

정관헌
고종이 커피마시던 곳.



돌아 나간다.

원래 '왕' 이런것을 무척 싫어한다.
TV 사극도 왕이 나오는 것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왜? 그시절 우리의 선조들은 왕을 위해 살았을까...
당연했겠지...

당연히 왕을 위해 살았겠지..
그 시대는 그랬다는 것이고.
그 시절이 너무 길었다는것이 역사에서 아쉬움이고.

시청 광장
기독교에서 815 라고 큰 집회를 열고있다.

덕수궁 들어갈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후기를 쓰면서 역사공부를 하게되는 구나...
아이들도 이렇게 공부하면 역사가 머릿속에 잘 들어갈것 같다.
만일 아이가 나 닮아서 국사를 못하게 된다면 이렇게 다니면서 가르쳐야 겠다.

한 여름에 찾았던 조선시대 왕이 살던 곳 구경을 마친다